'도시에서 반드시 남들과 같은 직장을 다니며 살 필요가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도 시골에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가끔(?) 귀농을 꿈꾼다.
만일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귀농 계획이 더 빨리 실현되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신문을 봤다.
나보다 먼저 귀농의 계획을 실현하신 선배님(?) 이야기가 실렸군.
앞으로 나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의 경험이 훗날 나에게도 용기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스크랩해 둔다.
"세상을 바꾼다고?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보식 기자 직격 인터뷰] 대학운동권서 변신한 중년 농사꾼 한승오
얼마 전 내게 ‘몸살-한승오 농사일기’이라는 책이 배달됐다. 몇몇 신문에는 그 서평이 게재됐다. 그래도 한승오(47)라는 이름은 세상에서는 낯설다. 비바람이 흩뿌리던 날, 길을 묻고 물어 충남 홍성군 홍동면까지 찾아가, 허구한 농사꾼 중 그를 만난 것은 사적(私的)인 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 ‘충혈된 눈’으로 서성대던 운동권이었고, 5공 시절 유행한 ‘강집’(강제징집)으로 국방의무를 마쳤고, 복학해서는 ‘공활’(공장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또 수배도 당했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졸업장을 받았다. 뒷날 결혼해서 출판사를 차렸을 때 잠깐 나와 왕래가 있었고, 그 뒤로 소식을 몰랐다.
그런 그가 7년째 농사를 짓고 있었고, 전공과 무관한 ‘농사일기’까지 쓸 줄은 예상치 못한 바였다.
‘어떤 모종이든 땅에 옮겨 심으면, 그 땅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다 흙으로 나가 혼자 힘으로 자리를 잡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모를 논에 내면, 처음 며칠 동안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시들시들해진다. 이를 보고 모가 몸살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죽이는 듯한 몸살을 겪으며 어린 벼는 인위의 껍질을 벗고야 만다.
시골로 들어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몸살은 늘 내 몸에 붙어다녔다. 고된 육체노동에 잔뼈가 굵지 않았던 내 몸은 쉼 없이 계속되는 농사일을 좇아가느라 마지막 남은 바닥 힘까지 토해내며 헉헉대기가 일쑤였다.’
한승오는 남방과 면바지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서 논배미로 마중 나왔다. 그의 집은 논과 고추밭에 맞닿아있었다.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낯선 인기척에 잠깐 짖다가, 다시 쭈그리고 누웠다. 평상에 걸터앉아 중년농사꾼으로 변신한 80년대 대학운동권에게 물었다.
―바깥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여기 머물면서 홀로 뒤처진다는 생각은 안 드나?
“혼자만 처져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골에서 내가 보는 눈은 정말 좁다. 아주 작거나 미세한 것을 보고 있지. 굳이 나를 위안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부정적인 뜻이었지만, 사실 개구리의 눈으로도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지. 가령 나는 고추를 심고 그 고추에 탄저병이 드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얻는 내 느낌과 깨달음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안 해. 세상이라는 것은 결국 통하는 것이다. 또 내가 여기서 농사짓지만, 도시 속에 산다고 자연을 잃는다고는 생각 안 해. 거꾸로 시골에 살고 있다고 자연을 얻는다고도 생각 안 해. 그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인생 역정만 별난 게 아니고 길가는 행인을 잡고서 살아온 내력을 풀라면 저마다 대하소설 감인데, 유독 그를 인터뷰한 것에 대해 얼마간 양해가 필요하다. 물론 젊은 날 80년대를 거쳐온 이들에게는 복고적 향수에 잠기게 하고, 귀농(歸農)을 혹 꿈꾸는 이들에게 실전적 정보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는 20마지기(1마지기는 200평)의 논과 500평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혼자서 트랙터를 쓰지 않고 20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것은 많이 짓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손톱 아래에는 시큼한 논흙이 끼어 있었다.
“농사는 짓지만 내 소유의 땅이 없이 모두 소작이다. 내 형편으로는 땅을 살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도 논 값이 싸지 않았는데, 지금은 논 한 평당 5만원이 넘어가. 대전에 있는 도청이 홍성 근처로 내려오면서 덩달아 여기도 땅값이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짓는 전답은 이곳 마을과 옆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아 농사짓기가 힘겨우니 논밭들을 내놓는다.”
―소작료를 얼마나 주나?
“논 한 마지기당 쌀 한 가마(80kg)값을 준다. 요즘에는 비료치고 농약치고 품종개량이 돼서, 논 한 마지기에 쌀 네 가마쯤 나온다. 내 논은 유기농을 하기 때문에 한 마지기에 약 세 가마가 나온다. 그러니 일년 농사로 60가마 소출을 하는 셈이다. 쌀 한 가마에 보통 15만원쯤 하지만, 나는 30만원씩 비싸게 받는다.
소작료와 농기계 빌린 경비를 빼면 일년 농사를 지어 1500만원이 남지. 살기가 빠듯하다. 노동판 일당보다 못하고, 돈으로 따지면 농사 못 짓는다. 집사람이 여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과 후 교실에서 영어 시간강사로 용돈 벌이를 한다. 밭농사 소출은 팔지 않고 집에서 먹거나 가까운 사람과 친인척들한테 보내줘. 밭 소작료로는 마른 고추 열댓근(1근은 600g)을 준다.”
―왜 농사를 지으러 들어왔나?
“7년 전이니까, 사십줄로 막 접어든 나이였다. 출판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삶 자체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아. 인생이 짧은데 사람이 산다면 좀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까. 어떤 이에게는 부(富)가 자유로움을 안겨줄 테고 어떤 이에게는 오히려 가난이 자유로운 것인지 모르지. 내 삶에는 무엇이 자유로움을 줄까. 사람 산다는 것이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사는데, 나도 한번 판을 바꿔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대책 없는 일을 벌인 것이지.”
―그래도 떠나온 서울이 많이 생각나겠지?
“첫해에는 내가 서울을 자주 갔다. 여기서는 더불어 이야기를 할 사람도 없고. 술을 한잔 하고 싶어도 같이 할 사람도 없다.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랑 어울려 내 갈증을 풀 수가 없다. 마음이 답답해 술 마실 친구를 찾아 서울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서울로 올라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정말 땅을 딛고 일하는 느낌이 좋다. 농사라는 것이 땅을 밟고 또 땅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속살이 드러난 땅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지 아나. 요즘에는 논을 가는데 모두들 트랙터를 쓴다. 다섯 마지기 논을 20분이면 다 갈아 엎어버린다. 대신 경운기로 하면 4~5시간 걸린다. 몰고 가야 하니까.
뙤약볕 아래서 하는 쟁기질은 참 힘들다. 쟁기날이 땅속으로 얕게 들어가면 쟁기날에 몸을 올려 힘껏 밟아야 하고, 쟁기날이 너무 깊이 들어가면 경운기 손잡이를 들어 올리며 운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일부러 경운기를 쓴다. 가끔 동네 사람들도 ‘힘들게 왜 경운기로 하느냐’고 묻는다. 발 밑에서는 쟁기가 논을 확확 뒤집어 엎어. 그렇게 뒤집혀 올라오는 논흙이 굉장히 육감적이야. 예전에는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 나에게 생각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힘들게 짓는 농사에서, 또 벼가 자라는 논들이 그런 생각을 준다.”
―농촌에 산다고 설마 삶의 욕망을 다 버린 것은 아닐 테고….
“욕망을 떨쳐 버리면, 그것을 다 벗었다면, 그것이 사람인가?”
―지금 가장 강렬한 욕망은 어떤 것인가?
“농사를 지으면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글을 쓰게 했다. 이전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질이 다른 느낌들을 부여잡을 수 있었거든. 일이 바쁘고 몸이 힘들 때 글이 더 잘 써졌던 거 같더라고. 짬짬이 밤에 끼적거리고. 그런데 그 느낌을 나 혼자 간직하지 않은 것은 무언가 욕망인 거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것이니까.”
―젊은 대학시절에 열중했던 이념과 비교하면 어떤가?
“청년 시절에 받았던 이념적 세례는 아주 강렬했지 않나. 그 이념은 도식적이었고, 지금의 내 생활이 그 연장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지워버리면 내가 이렇게 농사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로 인해 삶이 평탄했던 것이 아니라 온갖 곡절을 겪었으니, 사실 우습기도 한 거지.”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르게 살고 싶나?
“아마 다르게 살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게 굉장히 강렬했거든. 그런 시절이 다시 안 오겠지만, 다시 산다 해도 그런 강렬함이라면 나는 쫓아간다. 이념 자체가 현실과는 동떨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 이념을 붙잡고 있던 내 모습은 아주 현실적인 모습이야. 젊은 청년인 내가 그 이념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모습 말이지.”
―그때 무엇을 해보려고 그랬는가?
“…세상을 바꿔보려고 한 것이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것이었나?
“…”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욕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한가? 실제로 살아보니까 어떤가?
“후배들 중에는 ‘과거의 열정은 어디 가고 왜 조용하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 도대체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 내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모른다는 게 내 답이다. 자기를 바꾸지 않는 이상,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순서적으로도 맞을 수 없다.
그게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이든 아니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개혁이라는 것이 사람의 욕망들, 아주 세세한 감정들, 이런 것들까지 담아낼 수가 없거든. 지금 내 생각은 사람 개개인이 혹시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존중돼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서로 가끔 바라보았고, 대부분 시선은 울타리 너머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나무와 비 뿌리는 검은 하늘을 향한 채 말을 나눴다. 그는 “요즘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려 고추가 다 썩고 있다”며 농사일을 근심했다. 그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논물이 잘 빠지지 않는 논에는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 물길은 논의 사방 둘레와 한가운데 낸다. 여기서는 이를 ‘도구친다’고 말한다. 오늘 논에 도구를 쳤다. 700평 남짓한 논에 도구를 치는데 온종일 걸렸다.’
―지난 7년 동안 무엇이 가장 많이 바뀌었나?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그냥 시간이 가니까 일이 되는 건지, 그걸 모르겠더라. 옆집에 칠순 할머니가 30kg 벼 포대를 어깨에 척척 메고 옮겨. 나는 막 억지로 열 개쯤 나르니까 팔 힘이 빠져, 이렇게 끌어안고 갔어. 요즘은 척척 올라가지. 몸이 그렇게 변하더라고. 세월이 흐르니까 자연 일에 요령이 생기고 일머리가 생긴다는 느낌이 들어. 가장 많이 바뀐 몸의 변화는 이것이겠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몸은 힘겨워 해. 무릎 인대가 탈이 나고, 허리 때문에 한달 이상 누워있었다.”
―농촌에서 살면 하루의 일상이 솔직히 더 지루하지 않는가?
“농촌에 내려와 4년이 돼서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라는 첫 책을 냈다. 지금은 그때의 신선함은 없다. 이제는 일상 속에서 묻혀 살아가는 거지. 시골에서의 삶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성공이야. 내가 끊임없이 신선함을, 새로운 느낌을 쫓아서 이리 저리 옮겨 산다면 가족은 파탄이 났겠지. 결혼이 일상이 돼야 진정 부부의 삶이 된다. 만날 신혼처럼 새롭다면 그 긴장과 날카로움을 어떻게 감당하나.
농사일은 너무 힘들다. 그래서 몸살이 나는 것이다. 엄청나게 바쁠 때인데 다 던져놓고 집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처음에는 내가 들어온 곳이지만, 이제서야 내가 사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여기서 살 거냐?’라고 자신에게 물을 때가 있는데, 그냥 여기서 살 것 같아. 늙어갈수록 근력이 딸려 농사일은 힘들겠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현실일 것이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나?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닭이 울 때 일어나 지더라고. 우리 닭은 4시40분에 울어. 처음에는 아침잠이 많아 힘들었다. 자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시골에서는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사립문부터 열어둬야 한다. 그래야 복이 들어온다고 하지. 한여름에는 아침 10시면 햇볕이 뜨거우니, 새벽잠을 줄여서라도 그 전에 김맬 거 있으면 해야 한다. 잡풀들이 쑥쑥 자라. 날이 뜨겁다고 김매기를 게을리하면 논밭이 금세 풀밭으로 변해.
농사를 지어보면 파종, 김매기, 수확이 다 ‘때(時)’가 있다. 때를 잘 좇아가는 게 농사 일이다.”
―당초 대책 없는 귀농 결심에 가족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나?
“내가 살아온 걸 알면 내 말에 선뜻 동의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누구에게도 설득력이 없었거든. 해본 적도 없는 농사를 짓겠다니, 집사람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내 혼자서 미리 가겠다고 했다. 1~2년쯤 살다가 좋으면 내려오라고 했지. 그러자 집사람이 ‘떨어져 살면 서로 생각과 몸이 더 많이 바뀌고 정이 식을 것이다. 고생을 해도 같이 고생을 해야지”라며 물러섰다. 결국은 내가 고집을 피워서 내려왔다.
2001년 2월, 한겨울에 멀찍이서 이 집을 보는 순간 마음에 딱 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고 결정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였으니, 구들은 내려 앉아있었고 마당에는 정강이까지 잡풀이 차 있었다. 주인 연락처를 알아내, 집 수리는 우리가 해서 들어와서 살겠다고 했다. 읍내 근처에 하숙방을 잡고서 여기로 출퇴근하면서 보름간 집을 고쳤다. 집 수리해주고서 그냥 살고 있다.”
―주인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되겠군.
“그렇지. 구두계약이니까. 내가 이 동네 완전히 인심을 잃거나 사람 구실을 못 하거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살지 않으면, 그렇게 못할 거야. 설령 나가라고 하더라도 시골에는 집을 다시 장만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말미도 많이 줘야 해. 적어도 가을 수확은 다 마칠 때까지. 당초 주인에게 집을 팔라고 했지만 주인은 당장 팔 이유가 없었어.”
―현재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무가 있겠지?
“아버지가 징집영장을 들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나를 찾던 기억이 난다. 내일 모레 당장 입대해야 하는데, 자식놈 행방은 찾을 수 없고. 아버지는 내심 내게 기대는 했지만 그걸 말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것보다 더 내 자식에게 내 욕망, 가령 공부를 좀 안 하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끓고 그런 것들을 많이 표출하고 있어. ‘네가 이랬으면 좋다’고 하는 내 욕구를 내비쳐. 그런데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무는 자식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자식이 아버지의 취향대로 살아야 되겠나? 자식 장래를 생각해서 외국 유학도 보내는 세상에 정반대로 시골로 데리고 왔다.
“나는 부산에 살았지만,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정말 집을 떠나고 싶었다. 그게 나를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우리 아이들이 시골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 불리한 면도 있겠지만, 대신 강렬한 열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시골에 내가 들어온 것은 자식을 부여잡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나가겠다는 그 열망을 놓치지 않는다면, 더 넓은 곳으로 나갈 것이다. 서울에 있는 아이들만 더 큰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의 칠판만 보고 있다.
모판에 있는 모를 논에 옮겨 심으면 그때부터 자기 힘으로 커야 한다. 더 이상 모가 아니다. 그것은 벼다. 좁은 모 상자에서 빽빽하게 밀집해서 사는 것보다 넓은 논바닥에서 홀로 커가는 것이 벼에는 훨씬 좋다. 넓은 세상을 마주하면 여린 놈들도 강하게 자란다.”
고무장화를 신은 채 논배미에 선 중년농부를 남겨두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님도 시골에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가끔(?) 귀농을 꿈꾼다.
만일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귀농 계획이 더 빨리 실현되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신문을 봤다.
나보다 먼저 귀농의 계획을 실현하신 선배님(?) 이야기가 실렸군.
앞으로 나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의 경험이 훗날 나에게도 용기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스크랩해 둔다.
"세상을 바꾼다고?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보식 기자 직격 인터뷰] 대학운동권서 변신한 중년 농사꾼 한승오
▲ 한승오씨는 논 20마지기와 밭 500평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땅은 그의 소유도 아니다. 소작이다. 흙 묻은 검은 고무장화를 신은 한씨가 삽자루를 쥐고 농촌에 발을 딛고 섰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얼마 전 내게 ‘몸살-한승오 농사일기’이라는 책이 배달됐다. 몇몇 신문에는 그 서평이 게재됐다. 그래도 한승오(47)라는 이름은 세상에서는 낯설다. 비바람이 흩뿌리던 날, 길을 묻고 물어 충남 홍성군 홍동면까지 찾아가, 허구한 농사꾼 중 그를 만난 것은 사적(私的)인 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 ‘충혈된 눈’으로 서성대던 운동권이었고, 5공 시절 유행한 ‘강집’(강제징집)으로 국방의무를 마쳤고, 복학해서는 ‘공활’(공장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또 수배도 당했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졸업장을 받았다. 뒷날 결혼해서 출판사를 차렸을 때 잠깐 나와 왕래가 있었고, 그 뒤로 소식을 몰랐다.
그런 그가 7년째 농사를 짓고 있었고, 전공과 무관한 ‘농사일기’까지 쓸 줄은 예상치 못한 바였다.
‘어떤 모종이든 땅에 옮겨 심으면, 그 땅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다 흙으로 나가 혼자 힘으로 자리를 잡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모를 논에 내면, 처음 며칠 동안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시들시들해진다. 이를 보고 모가 몸살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죽이는 듯한 몸살을 겪으며 어린 벼는 인위의 껍질을 벗고야 만다.
시골로 들어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몸살은 늘 내 몸에 붙어다녔다. 고된 육체노동에 잔뼈가 굵지 않았던 내 몸은 쉼 없이 계속되는 농사일을 좇아가느라 마지막 남은 바닥 힘까지 토해내며 헉헉대기가 일쑤였다.’
한승오는 남방과 면바지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서 논배미로 마중 나왔다. 그의 집은 논과 고추밭에 맞닿아있었다.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낯선 인기척에 잠깐 짖다가, 다시 쭈그리고 누웠다. 평상에 걸터앉아 중년농사꾼으로 변신한 80년대 대학운동권에게 물었다.
▲ “인생은 짧은데 좀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무작정 홍성 시골로 내려왔지 ”
―바깥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데, 여기 머물면서 홀로 뒤처진다는 생각은 안 드나?
“혼자만 처져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골에서 내가 보는 눈은 정말 좁다. 아주 작거나 미세한 것을 보고 있지. 굳이 나를 위안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부정적인 뜻이었지만, 사실 개구리의 눈으로도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지. 가령 나는 고추를 심고 그 고추에 탄저병이 드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얻는 내 느낌과 깨달음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안 해. 세상이라는 것은 결국 통하는 것이다. 또 내가 여기서 농사짓지만, 도시 속에 산다고 자연을 잃는다고는 생각 안 해. 거꾸로 시골에 살고 있다고 자연을 얻는다고도 생각 안 해. 그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인생 역정만 별난 게 아니고 길가는 행인을 잡고서 살아온 내력을 풀라면 저마다 대하소설 감인데, 유독 그를 인터뷰한 것에 대해 얼마간 양해가 필요하다. 물론 젊은 날 80년대를 거쳐온 이들에게는 복고적 향수에 잠기게 하고, 귀농(歸農)을 혹 꿈꾸는 이들에게 실전적 정보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는 20마지기(1마지기는 200평)의 논과 500평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혼자서 트랙터를 쓰지 않고 20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것은 많이 짓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손톱 아래에는 시큼한 논흙이 끼어 있었다.
“농사는 짓지만 내 소유의 땅이 없이 모두 소작이다. 내 형편으로는 땅을 살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도 논 값이 싸지 않았는데, 지금은 논 한 평당 5만원이 넘어가. 대전에 있는 도청이 홍성 근처로 내려오면서 덩달아 여기도 땅값이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짓는 전답은 이곳 마을과 옆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아 농사짓기가 힘겨우니 논밭들을 내놓는다.”
―소작료를 얼마나 주나?
“논 한 마지기당 쌀 한 가마(80kg)값을 준다. 요즘에는 비료치고 농약치고 품종개량이 돼서, 논 한 마지기에 쌀 네 가마쯤 나온다. 내 논은 유기농을 하기 때문에 한 마지기에 약 세 가마가 나온다. 그러니 일년 농사로 60가마 소출을 하는 셈이다. 쌀 한 가마에 보통 15만원쯤 하지만, 나는 30만원씩 비싸게 받는다.
소작료와 농기계 빌린 경비를 빼면 일년 농사를 지어 1500만원이 남지. 살기가 빠듯하다. 노동판 일당보다 못하고, 돈으로 따지면 농사 못 짓는다. 집사람이 여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과 후 교실에서 영어 시간강사로 용돈 벌이를 한다. 밭농사 소출은 팔지 않고 집에서 먹거나 가까운 사람과 친인척들한테 보내줘. 밭 소작료로는 마른 고추 열댓근(1근은 600g)을 준다.”
―왜 농사를 지으러 들어왔나?
“7년 전이니까, 사십줄로 막 접어든 나이였다. 출판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삶 자체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아. 인생이 짧은데 사람이 산다면 좀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까. 어떤 이에게는 부(富)가 자유로움을 안겨줄 테고 어떤 이에게는 오히려 가난이 자유로운 것인지 모르지. 내 삶에는 무엇이 자유로움을 줄까. 사람 산다는 것이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사는데, 나도 한번 판을 바꿔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대책 없는 일을 벌인 것이지.”
―그래도 떠나온 서울이 많이 생각나겠지?
“첫해에는 내가 서울을 자주 갔다. 여기서는 더불어 이야기를 할 사람도 없고. 술을 한잔 하고 싶어도 같이 할 사람도 없다.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랑 어울려 내 갈증을 풀 수가 없다. 마음이 답답해 술 마실 친구를 찾아 서울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서울로 올라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정말 땅을 딛고 일하는 느낌이 좋다. 농사라는 것이 땅을 밟고 또 땅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속살이 드러난 땅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지 아나. 요즘에는 논을 가는데 모두들 트랙터를 쓴다. 다섯 마지기 논을 20분이면 다 갈아 엎어버린다. 대신 경운기로 하면 4~5시간 걸린다. 몰고 가야 하니까.
뙤약볕 아래서 하는 쟁기질은 참 힘들다. 쟁기날이 땅속으로 얕게 들어가면 쟁기날에 몸을 올려 힘껏 밟아야 하고, 쟁기날이 너무 깊이 들어가면 경운기 손잡이를 들어 올리며 운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일부러 경운기를 쓴다. 가끔 동네 사람들도 ‘힘들게 왜 경운기로 하느냐’고 묻는다. 발 밑에서는 쟁기가 논을 확확 뒤집어 엎어. 그렇게 뒤집혀 올라오는 논흙이 굉장히 육감적이야. 예전에는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 나에게 생각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힘들게 짓는 농사에서, 또 벼가 자라는 논들이 그런 생각을 준다.”
―농촌에 산다고 설마 삶의 욕망을 다 버린 것은 아닐 테고….
“욕망을 떨쳐 버리면, 그것을 다 벗었다면, 그것이 사람인가?”
―지금 가장 강렬한 욕망은 어떤 것인가?
“농사를 지으면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글을 쓰게 했다. 이전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질이 다른 느낌들을 부여잡을 수 있었거든. 일이 바쁘고 몸이 힘들 때 글이 더 잘 써졌던 거 같더라고. 짬짬이 밤에 끼적거리고. 그런데 그 느낌을 나 혼자 간직하지 않은 것은 무언가 욕망인 거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것이니까.”
―젊은 대학시절에 열중했던 이념과 비교하면 어떤가?
“청년 시절에 받았던 이념적 세례는 아주 강렬했지 않나. 그 이념은 도식적이었고, 지금의 내 생활이 그 연장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지워버리면 내가 이렇게 농사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로 인해 삶이 평탄했던 것이 아니라 온갖 곡절을 겪었으니, 사실 우습기도 한 거지.”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르게 살고 싶나?
“아마 다르게 살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게 굉장히 강렬했거든. 그런 시절이 다시 안 오겠지만, 다시 산다 해도 그런 강렬함이라면 나는 쫓아간다. 이념 자체가 현실과는 동떨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 이념을 붙잡고 있던 내 모습은 아주 현실적인 모습이야. 젊은 청년인 내가 그 이념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모습 말이지.”
―그때 무엇을 해보려고 그랬는가?
“…세상을 바꿔보려고 한 것이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것이었나?
“…”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욕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한가? 실제로 살아보니까 어떤가?
“후배들 중에는 ‘과거의 열정은 어디 가고 왜 조용하게 지내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 도대체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 내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모른다는 게 내 답이다. 자기를 바꾸지 않는 이상,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순서적으로도 맞을 수 없다.
그게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이든 아니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개혁이라는 것이 사람의 욕망들, 아주 세세한 감정들, 이런 것들까지 담아낼 수가 없거든. 지금 내 생각은 사람 개개인이 혹시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존중돼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서로 가끔 바라보았고, 대부분 시선은 울타리 너머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나무와 비 뿌리는 검은 하늘을 향한 채 말을 나눴다. 그는 “요즘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려 고추가 다 썩고 있다”며 농사일을 근심했다. 그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논물이 잘 빠지지 않는 논에는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 물길은 논의 사방 둘레와 한가운데 낸다. 여기서는 이를 ‘도구친다’고 말한다. 오늘 논에 도구를 쳤다. 700평 남짓한 논에 도구를 치는데 온종일 걸렸다.’
―지난 7년 동안 무엇이 가장 많이 바뀌었나?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그냥 시간이 가니까 일이 되는 건지, 그걸 모르겠더라. 옆집에 칠순 할머니가 30kg 벼 포대를 어깨에 척척 메고 옮겨. 나는 막 억지로 열 개쯤 나르니까 팔 힘이 빠져, 이렇게 끌어안고 갔어. 요즘은 척척 올라가지. 몸이 그렇게 변하더라고. 세월이 흐르니까 자연 일에 요령이 생기고 일머리가 생긴다는 느낌이 들어. 가장 많이 바뀐 몸의 변화는 이것이겠지. 그러면서도 여전히 몸은 힘겨워 해. 무릎 인대가 탈이 나고, 허리 때문에 한달 이상 누워있었다.”
―농촌에서 살면 하루의 일상이 솔직히 더 지루하지 않는가?
“농촌에 내려와 4년이 돼서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라는 첫 책을 냈다. 지금은 그때의 신선함은 없다. 이제는 일상 속에서 묻혀 살아가는 거지. 시골에서의 삶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성공이야. 내가 끊임없이 신선함을, 새로운 느낌을 쫓아서 이리 저리 옮겨 산다면 가족은 파탄이 났겠지. 결혼이 일상이 돼야 진정 부부의 삶이 된다. 만날 신혼처럼 새롭다면 그 긴장과 날카로움을 어떻게 감당하나.
농사일은 너무 힘들다. 그래서 몸살이 나는 것이다. 엄청나게 바쁠 때인데 다 던져놓고 집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처음에는 내가 들어온 곳이지만, 이제서야 내가 사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여기서 살 거냐?’라고 자신에게 물을 때가 있는데, 그냥 여기서 살 것 같아. 늙어갈수록 근력이 딸려 농사일은 힘들겠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현실일 것이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나?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닭이 울 때 일어나 지더라고. 우리 닭은 4시40분에 울어. 처음에는 아침잠이 많아 힘들었다. 자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시골에서는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사립문부터 열어둬야 한다. 그래야 복이 들어온다고 하지. 한여름에는 아침 10시면 햇볕이 뜨거우니, 새벽잠을 줄여서라도 그 전에 김맬 거 있으면 해야 한다. 잡풀들이 쑥쑥 자라. 날이 뜨겁다고 김매기를 게을리하면 논밭이 금세 풀밭으로 변해.
농사를 지어보면 파종, 김매기, 수확이 다 ‘때(時)’가 있다. 때를 잘 좇아가는 게 농사 일이다.”
―당초 대책 없는 귀농 결심에 가족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나?
“내가 살아온 걸 알면 내 말에 선뜻 동의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누구에게도 설득력이 없었거든. 해본 적도 없는 농사를 짓겠다니, 집사람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내 혼자서 미리 가겠다고 했다. 1~2년쯤 살다가 좋으면 내려오라고 했지. 그러자 집사람이 ‘떨어져 살면 서로 생각과 몸이 더 많이 바뀌고 정이 식을 것이다. 고생을 해도 같이 고생을 해야지”라며 물러섰다. 결국은 내가 고집을 피워서 내려왔다.
2001년 2월, 한겨울에 멀찍이서 이 집을 보는 순간 마음에 딱 들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고 결정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였으니, 구들은 내려 앉아있었고 마당에는 정강이까지 잡풀이 차 있었다. 주인 연락처를 알아내, 집 수리는 우리가 해서 들어와서 살겠다고 했다. 읍내 근처에 하숙방을 잡고서 여기로 출퇴근하면서 보름간 집을 고쳤다. 집 수리해주고서 그냥 살고 있다.”
―주인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되겠군.
“그렇지. 구두계약이니까. 내가 이 동네 완전히 인심을 잃거나 사람 구실을 못 하거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살지 않으면, 그렇게 못할 거야. 설령 나가라고 하더라도 시골에는 집을 다시 장만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말미도 많이 줘야 해. 적어도 가을 수확은 다 마칠 때까지. 당초 주인에게 집을 팔라고 했지만 주인은 당장 팔 이유가 없었어.”
―현재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무가 있겠지?
“아버지가 징집영장을 들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나를 찾던 기억이 난다. 내일 모레 당장 입대해야 하는데, 자식놈 행방은 찾을 수 없고. 아버지는 내심 내게 기대는 했지만 그걸 말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것보다 더 내 자식에게 내 욕망, 가령 공부를 좀 안 하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끓고 그런 것들을 많이 표출하고 있어. ‘네가 이랬으면 좋다’고 하는 내 욕구를 내비쳐. 그런데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무는 자식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자식이 아버지의 취향대로 살아야 되겠나? 자식 장래를 생각해서 외국 유학도 보내는 세상에 정반대로 시골로 데리고 왔다.
“나는 부산에 살았지만,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정말 집을 떠나고 싶었다. 그게 나를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우리 아이들이 시골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 불리한 면도 있겠지만, 대신 강렬한 열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시골에 내가 들어온 것은 자식을 부여잡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나가겠다는 그 열망을 놓치지 않는다면, 더 넓은 곳으로 나갈 것이다. 서울에 있는 아이들만 더 큰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의 칠판만 보고 있다.
모판에 있는 모를 논에 옮겨 심으면 그때부터 자기 힘으로 커야 한다. 더 이상 모가 아니다. 그것은 벼다. 좁은 모 상자에서 빽빽하게 밀집해서 사는 것보다 넓은 논바닥에서 홀로 커가는 것이 벼에는 훨씬 좋다. 넓은 세상을 마주하면 여린 놈들도 강하게 자란다.”
고무장화를 신은 채 논배미에 선 중년농부를 남겨두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출처 : 조선일보 2007년 8월 25일 土日 섹션 Why? <원문>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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