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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이야기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영화 개봉을 앞 두고 광고를 많이 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나도 그 광고를 보고 이런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용은 많이들 아는 것과 같이 갑자기 99.99999....%(≒100%) 전염되는 실명 현상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오직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실명되지 않아 실명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느낌이다.

흥미로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의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영화가 아직 개봉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영화를 보고 나면, 대략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알게 되어 책이 별로 읽고 싶어지지 않게 되곤 할 뿐만 아니라, 또 책의 내용을 영화감독이 해석한 그대로 (무의식적으로라도) 받아들여서 나 스스로의 생각이 제한받는다는 느낌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보문고에서 인터넷으로 저렴하게 구입했다.(주로 학교 전자도서관에서 ebook으로 받아보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소설책을 구입한 것 같다. -.-;)






책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단단한 느낌의 커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읽을 때는, 독특한 문체때문에 쉽게 쉽게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다. 띄어쓰기를 배제한 이상의 작품보다는 덜하지만, 마치 이상의 문체를 보는 느낌이었다. 대화의 내용인데 따옴표도 없고, 심지어 줄바꾸기도 인색했으며, 문장부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물음표라도 있었다면 이것이 묻는 말인지 그냥 서술하는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뒤의 문장까지 다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게되는 경우도 있었다.
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이런 문체를 사용한 것일까?
단지 그의 작품 가운데 '눈먼 자들의 도시'만 읽어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작가 역시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 눈이 멀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소설의 뒷부분에, 첫번째로 눈이 멀었던 남자의 집에 한 작가가 들어와 살면서 경험한 것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쓰고있었는데, 그 작가가 주제 사라마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쓸 수 있죠, 의사의 아내가 물으면서 종이를 보았다. 방 안이 어둠침침하긴 했지만 그녀는 빽빽한 문장들을 볼 수 있었다. 문장들은 이따금씩 아래위가 겹치기도 했다. 손으로 만지면서 쓰는 거죠, 작가는 웃으며 대답했다.(p.412)


흔히 보는 문체는 아니었지만,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적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독특한 설정과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책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좀비가 되어가는가?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난 것은, '좀비 영화'였다.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서 사람이 좀비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통화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비를 다룬 다른 것들보다 사람이 어떻게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가에 대한 과정을, 인간적인(인간이었던 존재의) 관점에서 납득할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레지던트 이블과 같은 좀비 영화를 보면 어떠한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에 의해 기존의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굉장히 역동적이고 어마어마한 변화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러한 커다른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좀비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먹어치우려는 식욕으로 움직이지만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흡혈귀처럼 단순히 싱싱한 피 몇 모금 빨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왕성한 식욕을 사람을 공격한 순간 어디로 보내버리고, 몇 번 물고 끝을 내는지, 게다가 인지능력을 상실한 존재가 왜 자신들끼리는 본숭만숭하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만 공격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영화로 표현하는 데에 따른 한계점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전에 인간답다고 했던 것들은 정말 순식간이라고 할만큼 빨리 사라지고,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좀비와 다를바가 없는 존재로 변해버린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배설물과 오물 투성이가 되고, 사람들은 오로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서로 의심하고 싸운다. 만약 의사의 아내가 자신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다면,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서 지배가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도 할 수 있겠지만, 또한 모든 눈먼자들의 노예가 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가지고 있는 볼 수 있는 능력, 이것 하나만의 상실로도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얼마나 쉽게 전락할 수 있는지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이룩해온 예의, 도덕, 문화라는 것들이 얼마나 약한 것이며, 가식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먼 자들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는 남들이 보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이전에는 느꼈을 수치심은 사라져버린다. 또 그 가운데 힘을 가진 자들은 다른 약한 자들을 지배하려하고 억압한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나는 '분노'를 느꼈다기 보다는 '연민'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만약 그러한 상황에 나역시 처하게 된다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바르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양심적인 행동도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한마디로 덮어버리고,
'아무도 모르는데...', '남들도 다 그러는데...', 이런 말들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역시 눈먼 자들의 도시다. 우리 역시 눈먼 자들이고.
눈이 멀었기 때문에 동물적일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은 잘 씻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더러웠다는 점 말고는 없다. 그외의 것들(자신이 가진 음식을 지키기 위해 의심하고, 더 갖기 위해 속이고,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성관계를 갖고...)은 교묘하게 눈을 속이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내용을 생각해보면서 느꼈던 가장 큰 충격은 우리 역시 눈먼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눈이 멀었지만 보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없는 세상

볼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이름이 없다. 소설의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의 아내나, 안과의사, 검은 선글라스를 썼던 여자, 첫번째로 눈이 멀었던 남자와 그 부인,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누구의 이름도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부분은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눈이 먼 세상 속에 살게 된다면, 눈이 보일 때보다 이름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부를 때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름을 부르며 말하는 편이 의사소통에 더 편리하고 효율적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의 이름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이름이 없다는 점은, 우리가 흔히 그러하듯 이름을 가진 다른 주인공들에게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지지를 보내는 공정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준다.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행동이 정당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작가의 의도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속에는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독자 역시 눈이 멀지 않은체 그들을 함께 지켜보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또한 모두에게 이름이 없다는 점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결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 때,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이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미국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요구의 표현으로 당선됐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버락 오바마'나 MS라는 거대 기업을 만든 '빌 게이츠',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하려하는 가수 비 '정지훈', 피겨스케이트의 여왕 '김연아'... 모두 유명(有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에서 봤을 때, 이들의 이름이 가슴에 깊이 새길 만큼 의미있는 것일까? 나는 그들을 알더라도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와 같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를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몇 개나 공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눈먼 자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눈이 보인다는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p.461)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사람들. 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느낀 점은, 우리의 신체 어느 한 곳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어느 한 부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력을 상실했을 때의 그 불편함과, 사람들이 그로 인해 각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의 사회기능의 마비.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건강한 내 몸에 감사를 하고, 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 책은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았고, 한 번 읽고는 소설의 내용은 알게 됐지만 숨겨진 메세지는 많이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책이 한 권 더 생겨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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